이번에 KBS 시사기획 창에서 광복 74주년을 기념해,
밀정, 배신의 기록이라는 시사 다큐를 방영했습니다.
(하단에 KBS 시사기획 창 방영분을 볼 수 있습니다. _링크)
요즘 안팎으로 정체성 확립의 시기인지 역사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미 거쳐야 했던 일들이 유야무야 그냥 지나왔던 것 같습니다.
영화 밀정 포토
밀정하면 생각하기도 싫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영화 밀정이 떠오릅니다.
그만큼 악랄한 단어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해방과 동시에 흔적도 없이 사라진 이름 밀정"
그럼, 다큐를 통해 전체적인 것을 따라가 보겠습니다.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밀정한테 당할 때는
친구들, 잘 아는 사람 이들한테 당해요.
"얼마가 모여도 밀정 하나가 있으면 그 조직은 와해가 된다."
치열한 독립운동에서 사라져야하는 이름 밀정.
"밀정들로 인해 서로가 서로를 의심하게 된다는 거죠, 한번 의심이 쌓이게 되면 절대 일을 같이 할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밀정은 시작합니다.
이 취재를 하면서 알게 된 895명의 이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오늘까지 밀정에 대한 조사나 연구는 이루어진 적이 없었다고 한다.
발견된 보고서들이 전부 밀정이 보낸 보고서인데도 말이다.
그리고 그 주체가 된 사람들은 전부 숨어버렸다.
"밀정은 일본의 독립운동 전선에서 독립운동가나 독립운동 조직이나 독립운동 활동에 대해서 정보를 일본 쪽에 제공하는 사람들이다."
일본 당국이 독립운동을 탄압하고 진압하기 위해서 또는 독립운동가를 체포하고 잡아들이기 위해서 정보 전달자들이 필요했던 것이다.
일본 당국이 독립운동을 탄압하고 진압하기 위해서...
밀정 (密偵) - 사전에 등재된 풀이는 명사로 '남몰래 사정을 살핌, 또는 그런 사람.'
다른 말로는 스파이, 간첩, 염탐꾼 등으로 불린다.
밀정들은 현재의 아주 생생한 정보들을 제공했다.
해방. 누군가는 독립을 위해 목숨을 걸었지만 누군가는 동포를 팔았다.
당시 대한의 독립은 미지수였다. 그 독립운동의 미지수라는 것에 현혹되어서 자신의 안위를 지키고 편하기 위해서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일본의 공작을 이기지 못해서 조국을 버리는... 참상을 만들어냈다.
독립운동사, 백점일지, 한국강정자료집(韓國强占資料集), 안중근의사자료집
밀정에 대한 정보는 밀정을 고용하고 밀정들에게 일일이 보고를 받은 당사자인 일본이 남긴 자료에서부터 시작했다.
100년 전 작성된 군내부 기밀 보고서
1919년 7월 조선군 참모장이 육군차관에게 보내는 보고서에 첨부된 한 장의 사진.
밀정이 입수해 보고한 사진이다.
가로 54cm, 세로 20cm
1919년 초기임시정부 사람들의 모습
독립운동가와 그 가족들이 한자리에 모여 사진을 찍었다.
남성 178명, 여성 24명, 아이들 23명, 모두 225명.
일본은 사진에 대해 이렇게 기술했다. 상해에 있는 조선인 간부와 결사자 2벽여 명.
사진은 극비로 분실할 때는 제재를 가한다는 서약 아래 엄밀하게 보관해야 하는 것이다.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2대를 지낸 손정도 (1881-1931)
상해 교민단장을 맡았던 김홍서 (1886-1959)
김구 선생을 늘 옆에서 보좌했던 엄항섭 (1898-1962)
곽윤수 선생은 거쳐가 없던 임시정부에 자신의 집을 사무실로 제공했던 독립유공자다.
2010년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교민단 사무소 겸 임시정부 임시 사무소로 활용되고 있었다.
그런 독립운동가들의 얼굴이 공개된 사진이 일본에 넘어간 것이다.
상인 곽윤수 선생의 유족이 있는 상하이로 갔다.
그곳에서 곽윤수 선생의 첫째 딸인 곽종옥 여사와 외손자를 만나게 된다.
밀정에 의해서 가족이 배신을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유족은 충격보다는 뭔가 이제야 이상한 점이 풀린다는 반응이었다.
당시에 누군가가 할아버지를 배신해서 일본이 죽이러 온다는 소리를 들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유족은 겸허히 받아들이며 이런 말을 남깁니다.
곽윤수 선생의 외손자 - "역사적 관점에서 보면 속상할 필요가 없습니다.
어느 시대나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은 공존하기 마련이니까요
영웅이 있으면 배신자가 있는 거니까요."
일본 외교사료관
"외무성이 생긴 이래 취합된 모든 자료가 모여져 있다고 보시면 돼요."
"중요한 점은 우리를 식민 지배했을 때 대만, 만주, 조선 이쪽에 각 영사관이 나가 있었잖아요 중요한 지역에 특히 만주, 시베리아 이쪽에 가 있던 영사관에서 취합된 자료들이 다 여기 와 있는 겁니다."
불령단관계잡건<不逞團關係雜件>
나쁜 조선인 이런 뜻인데 좀 비하된 내용으로 불량하다는 뜻도 있지만, 나쁜 사람, 반항적이고 고분고분하지 않고 아주 나쁜 사람들, 불령선인 나쁜 조선인들이라고 보면 된다고 한다.
일본 보고서에는 독립운동가와 밀정의 기록이 동시에 남겨져있다.
1909년, 하얼빈 역.
"안중근 의사가 일본 제국주의의 상징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했다! "
일본 입장에서는 큰 충격이었고, 정보(첩보) 수집에 필요성을 느꼈다.
안중근 의사와 함께 거사에 참여했던 동료들 류동하, 조도선, 우덕순.
우덕순과 안중근은 채가구 역 반지하 호텔에서 하룻밤을 함께 묵었다.
어느 역에서 내릴지 모르는 이토를 향해 다음날 우덕순은 간이역인 채가구 역에 남았고 안중근은 하얼빈 역으로 향했다.
거사에 가담한 사람들은 모두 일본에 체포되었고,
안중근 의사는 사형을 선고받고 1910년 3월 26일 순국했다.
우덕순도 3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른다.
10년 뒤인 1920년대에 들어 우덕순은 이상행보를 보인다.
1925년 일본 공문서 조선인민회 회장이 된 우덕순.
하얼빈 조선인민회 회장 우덕순이 일본 외무대신 시데하라에게 보낸 예산 지원 요청서다.
"본회는 일본 외무성 보조를 받고 요즘 실적이 크게 올랐습니다.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올해도 보조금을 받고자 예산서를 첨부해 보냅니다 받들어 원하는 바입니다."
조선인민회와 일본 사이에서 예산 요청서와 집행 내역서는 지속적으로 오갔다.
조선인 거류 민회(조선인민회)의 특징은 일본 영사관의 조종을 받는 것이다.
이른바 꼭두각시 아바타. 예산, 인력 지원, 그중에서 중요한 임무는 조선인을 감시하는 것인데, 여기서 감시 대상은 독립운동가들을 말한다.
하얼빈 조선인민회에 대한 일본의 평가는 다른 지역에 조선인민회 보다 흡족했다는 평가다.
하얼빈은 우리 동포가 가장 많이 살았던 곳이다.
한국인을 통제하기 위해 일본은 막대한 예산을 투입했는데,
그중 밀정비, 첩보비, 기밀비에 같이 독립운동가를 감시하는데 많은 예산을 투입했다.
1920~21년 밀정의 월급은 50엔, 50원이었다.
당대 엘리트인 교사 초임이 45원이었다.
"이한제한 한인으로써 한인을 통제하겠다."
그리고 북만호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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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만호텔에서 우덕순는 일제 특무기관(일본의 첩보 조직)원과 식사를 했다. 25엔(현재 수백만원)이라는 금액을 사용하면서 말이다.
그 후, 1934년 매일신보의 보도 치치하얼 지역에서 조선인민회 활동을 이어갔다.
우덕순은 한국전쟁 중인 1950년 세상을 떠났다.
1962년 건국 훈장 독립장을 받았고, 국립현충원에 안장됐다.
여전히 안중근 의사의 동지로서 독립유공자로 기억되고 있다.
보훈처에 우덕순의 이상행동에 대해 질의했으나, 국가유공자에 대해 종합적 검토 중이라는 답변만이 돌아온다.
후손들 중 국가유공자 혜택을 받는 사람은 없다고 한다.
그리고...
여기까지는 저도 믿고 있었던 내용이었는데, 우덕순에 관한 다른 관점의 기사를 읽으면서 더 확인을 해보았는데요.
우덕순에 대한 논쟁은 아직 계속되고 있다. 방송에서는 20년대 행적을 기록한 것이어서 빠져있는지는 모르지만 포스팅하다가 찾아낸 기록을 보니, 안중근의 민족운동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신운용 박사의 연구와 의견을 더 확인해 봐야할 것 같아 여기서 이만 줄이기로 한다.
우덕순이 배일사상(일본에 관한 것들을 배척하는 사상)이 농후했다는 조선총독부 경무국이 1934년 '외국의 용의 조선인명부'에 기록한 내용이 있다.
작성하다가 잠시 멘붕에 빠졌었지만 그래도 밀정 사실은 지워지지 않는 것이니... 개인적으로 너무 궁금하고 답답한 마음에 후속 연구가 좀 더 이루어졌으면 하는 마음뿐이다.
청산리 전투로 일제에 맞서 독립군의 영원한 영웅으로 기록된 뱍야 김좌진 장군.
1920년 10월 청산리 전투.
안타깝게도 그에 관한 정보나 기록물, 유품이 없다.
일제강점기 이후 허허벌판이였던 곳을
1991년도에 문화재청의 승인을 받아 복원한 김좌진 장군의 생가.
또 하나의 일본 기밀문서에서 그의 관한 기록물이 발견됐다.
"현 대한민국군단 총사령관 김좌진은, 키 6척 1촌 5부(180cm 정도)
얼굴은 타원형이고 눈빛은 형형하고 사람을 두렵게 하며 똑바로 볼 수 없게 만드는 느낌이 있다."
"유도, 승마, 권총 사격에 능하다."
"총명함이 출중하며 좌담에 능하다
특히 해학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이 내용은 김좌진 장군의 측근이 일본에 보낸 보고서다.
김좌진 장군이 이끌었던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내부 사정을 알기 위해
국회도서관에 있는 독립운동사 자료집을 보면 '사령부 일지인 진중 일지(陣中日誌)가 있다.'
이것은 그 당시 독립군의 사정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다.
진중 일지를 작성한 사람은 김좌진 장군의 비서이자 참모인 이정이다.
이정 일기로도 알려져 있다.
그는 공로를 인정받아 1963년 건국 훈장 독립장을 받았다.
그러나...
이정은 진중일지를 쓰고 나서 몇 년 뒤 전혀 다른 사람이 된다.
이정(李楨)은 진중일지를 쓴 4년 뒤 독립군 동지들을 배신한다.
"의열단장 김원봉과 연락해 올봄부터 단원 심여 명을 보내 일본 영사 중요 관리나 친일 조선인 등을 암살해 민심을 격동시킬 계획을 갖고 있다."
특히 군자금에 대해서 상세히 밀고했다.
"1923년 12월 이승만이 미국에서 모집한 2만 불이 왔는데, 이 중 절반은 노백린이 받아 임시정부 경비로 충당했고, 나머지는 대한독립군단에 보냈다."
"또 같은 해 5월 대한독립군단 이홍래가 경성에서 3만 엔을 받아 간도로 와서 총 4만 엔이 독립군단 재무부에 보관돼 있다."
"이홍래는 1923년 교묘하게 변장해 함경남북도, 경성, 대구 방면에서 군자금 모금 활동을 했다."
이정이 군자금 모집 담당으로 밀고한 이홍래 선생은 이정의 밀고 직후인 1924년 4월 일본 경찰에 체포돼 징역형을 선고받는다.
그리고 이정은 독립군에 관한 상세 정보를 넘겨준다.
독립군 간부에 개인별 특징을 매우 상세히 기록해 전달했다.
특기, 외모, 출신 지역.
생김새의 묘사는 실제 모습과 매우 흡사했다.
당시 참모장인 이장녕 선생의 후손을 찾았다.
이장녕 선생은 김좌진 장군과 함께 북로군정서를 조직하고 독립군 양성에 매진했다.
이장녕 선생은 이정의 밀고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밀정의 밀고로 1932년 사망했다.
이장녕 선생의 후손
"우리 할아버지가 밤낮 나다니다가 집에 온 걸 어떻게 알겠어요. 암암리에 서로 자기들끼리 밀정들이 알아서 사주를 한 거예요. 와 있으니까 잡아서 처치해라"
그전에는 몰랐던 조부에 관한 얘기(키, 신체 특징 등)를 역설적으로 일본 기밀문서를 보고 알게 되었다고 한다.
이정의 위패는 그가 밀고한 이홍래 선생과 나란히 안치되어있다.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치되어있는 밀고자와 피해자.
그런데 이정에 관한 내용이 두 가지로 확인되었다.
청산리 전투 이후 지방 피신 중 피살
또 다른 하나는 대종교인 검거 고문 옥사
이렇듯 살해당한 것과 옥사한 두 번 숨진 것으로 나와있다.
서훈 심사 시 두 인물이 섞인 것으로 보인다.
보훈처는 어떤 정보가 맞는지 모른다고 답했다고 한다.
이정의 후손들은 취재진과의 만남을 거절했다고 한다.
크게 보면 일본 외무성이 각 해외 영사관마다 밀정을 두었고,
치안을 맡은 조선총독부 경무국이 고용한 밀정.
그리고
조선군사령부 헌병대, 군에서 직접 고용한 밀정이 있었다.
그렇게 실핏줄로 연결된 밀정의 규모는 일본 자신도 정확히 파악하기 힘들 만큼 방대했다고 한다.
외무성에서 생산한 정보라 하더라도 육군, 경찰, 검찰 다 보내게 돼 있다고 하는데, 체계가 잘 잡혀 발송 선이 어디 어디에서 보낸다는 자료의 출처를 남겼다는 것 같다.
식민지 경영을 하는 악랄한 일본.
일제 패망 이후 1950~60년대 중국 당국이 파악한 자료 가운데 하나다.
원동기 면허가 있어야 활동이 용이한 점을 이용한 것 같다.
함경북도 길주군 출신의 밀정 김재룡은 원동기 자격증을 보유했다.
김연하 1920~30년대 만주지역에서 첩보 업무를 담당하면서 직접 정보를 모으고 밀정들을 관리했다.
허동수 1930년대 중국 지린성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한국인 밀정으로 여러 이름을 써 가며 독립운동가들의 정보를 빼돌렸다.
3.1 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대한민국임시정부구지 大韩民国临时政府旧址>
"우리의 역사를 직시한다는 것은 과거의 빛과 그늘을 모두 다 들여다보는
데서 출발한다고 믿고 있다."
KBS 탐사보도부가 일본과 중국 기밀문서에서 밀정 혐의가 드러난 895명의 이름을 확인했다. 하지만 이것은 빙산의 일각이라고 한다. 아직 일본이 공개하지 않은 문서에는 더 많다는 얘기일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시간이 많이 지났는데, 그걸 다시 해서 분열을 시킬 필요가 있냐고 하는데, 역사에서 민족 행위하고 반민족 행위라는 문제는 반드시 규명을 해야 됩니다."
"규명을 해야 하는 이유는 만일에 똑같은 일이 벌어졌을 때"
"그걸 만일에 안 해 놓으면 나중에도 똑같은 일이 반복되는 거죠."
"역사에서 민족의 죄를 지은 것은 민족의 죄라고 하는 것을 분명히 규정해 놓을 필요가 있다."
맞습니다.
2부도 작업해서 올리겠습니다.
<시사기획 창 밀정 1부- 배신의 기록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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